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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일지

2004년 12월 17일 설악산 대승골을 가다

 이 글은 지난 2005년에 우리교육 출판사에 연재했던 생태세밀화 작업일지 내용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늦어진 가을 취재, 초겨울에 대승골을 가다. 어디를 다녀온다는 것이 힘이 들 때가 있다. 서로 앞에 있는 일들이 있어서 함께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10월부터 잡은 가을 산양 취재를 12월 17일에서야 설악산 대승골로 갔다. 여느 때와는 달리 박그림선생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조금 벗어난 휴게소에서 만나 같이 갈 수 있었다. 


 

낮 12시 반쯤, 양수리를 조금 지나서 점심으로 콩나물국밥 한 그릇씩 먹고 쉬엄쉬엄 길을 갔다. 우리끼리 갈 때는 양평, 홍천을 거쳐서 인제를 지나 바로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홍천을 지나서 상남, 현리를 거쳐서 인제, 설악산으로 길을 에둘러 갔다. 현리를 지나 인제로 가는 길에 가리산 뒤를 바라볼 때쯤 게슴츠레 달이 떴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니 여유 있는 마음도 생기고, 새로운 길에서 보는 풍광도 즐겁다. 날이 어두워서 백담사입구에 다다랐다.

 

 절 공양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백담사입구에서 순두부백반 한 그릇씩 먹고 깜깜한 길을 따라 백담사에 올랐다. 너무 늦어서인지 숙박 일을 보는 보살이 없었다. 박그림선생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아내어 힘들게 잠자리를 마련했다. 따듯한 방구들이 몸을 녹인다. 박그림선생이 10월에 대승골을 조사하면서 찍은 사진을 구경 하다가 밤 10시쯤 잠이 들었다. 18일 새벽, 저마다 자주 잠을 깨는 눈치였다. “어어, 공양시간 끝났겠네.” 박그림선생 말에 벌떡 일어났지만 벌써 아침 7시다.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이미 공양시간이 끝났다. 하는 수없이 “그냥 올라가죠.” 했더니 “밥 안 먹으면 못 올라가요, 먹는 자만이 앞으로 갈 수 있어요.” 또 박그림선생이 애를 썼다. 맛 나는 절밥 한 그릇 얻어먹고 따듯한 물과 주먹밥도 챙길 수 있었다. 조금 늦은 아침 8시 반쯤 전나무 군락이 있는 대승골로 길을 나섰다. 백담사를 벗어나자 계곡물이 바깥쪽부터 얼어 들어가고 있다. 얼음 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계곡물로 내려갔다. 그런데 얼음보다 좁다란 모래 위에 난 동물 발자국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닌 발자국이 줄줄이 나있다. 너구리와 수달 발자국이다. 모래가 꽁꽁 얼어서 밟아도 부서지지 않는다. 수달 발자국은 모래 위를 걷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종종종 걷는 앙증맞은 수달 모습이 그려진다. 다른 발자국을 따라서 올라갔더니 큰 바위 밑으로 시커멓게 말라붙은 수달 똥이 널려있다. 예전에 동강에서 보았던 마르지 않은 수달 똥이 생각났다. 금방 눈 똥을 보면 물고기 가시나 비늘 따위가 그대로 섞여 나오기 때문에 뭘 먹었는지 알 수 있다. 홍수 때 뿌리 채 뽑혀서 떠내려 온 나무 한 그루도 누워 있다. 뿌리에 조금 붙어있는 흙에 달맞이꽃이 뿌리를 내렸다. 


 

다시금 질긴 생명력을 느낀다. 계곡을 지날 때마다 돌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투명하다. 햇빛에 반짝인다. 자연은 저마다 다르고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자연을 느끼고 몸으로 받아들이려면 몸이 건강해야 하고 끊임없이 찾아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걷는 길이 포근하다. 겨울이라기보다는 늦가을 같다. 포삭포삭 걸어 지난번 피골 취재 때 먹을 물을 퍼 담았던 자리에 이르렀다. 피골은 앞 산등성이를 타고 올랐지만 이번에는 대승골을 가기 위해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낙엽이 쌓인 포근한 길이 이어졌다. 해발 650m쯤 지점에서 뜻밖에 똥이 보였다.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산양이 여기까지 내려와요.”(이 길은 휴식 년이기 때문에 사람이 들어올 수 없다.) 박그림선생 이야기를 들으며 똥을 살폈다. “아아, 어려워요 산양 똥보다는 작고 똥끝이 뾰족한걸 보면 노루 똥 같기도 하고....” 누구 똥인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똥 무더기가 계속 이어져 있다. 산양은 똥을 같은 자리에 무더기로 누는데 흩뿌리듯이 싸 놓은 것으로 보아서 노루 똥이라고 의심 섞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박그림선생이 똥을 비닐봉지에 담아 서울대학교에 보내서 유전자 감식을 해본다고 했다. 산양은 똥을 같은 자리에 여러 번 무더기로 누고, 똥끝이 동글동글 하다. 그리고 똥 크기도 고르다고 한다. 그런데 노루는 똥을 흩뿌리듯이 누고, 산양 똥보다 조금 작고, 똥 크기도 크고 작은 차이가 많다고 한다. 위로 올라가면서 한동안 똥 무더기가 이어졌다. 눈이 녹으면서 만든 고드름이 바위마다 달려있다. 금방 눈 것 같은 똥이 보였다. 아직 점액이 마르지 않아서 반들반들하고 겉이 끈적끈적하다. 


 

그런데 이 똥은 좀더 크고 눌린 듯이 똥에 각이 져있다.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누구 똥인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유전자 감식을 하려고 다시 똥을 담았다. 그리고 위를 향해 걸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조릿대 군락을 지나 가파른 산등성이를 오른다. 바위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햇살이 따듯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산양이 앉았다 간 자리를 만났다. 낙엽이 납작하게 눌려있다. 그 옆에는 오래된 똥 무더기가 있다. 조금 더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작은 산마루가 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오래된 산양 똥 무더기가 있다. 


 

똥색이 허옇게 바뀌고 있지만 밑에서 본 똥과는 느낌이 다르다. 큼직하고 타원형으로 둥글둥글하다. 묵직해 보인다. 위로 올라가면서 멧돼지가 먹을거리를 찾으려고 파 놓은 흙구덩이가 많이 보인다. 멧돼지 힘을 실감케 한다. 참호만큼 큰 것도 있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바위벽을 지나 해발 1,000m 능선에서 산양자리를 만났다. 이곳도 시야가 탁 트였다. 사방을 경계하기가 좋다. 찬바람이 뺨을 때려 얼굴이 얼얼하다. 늙어 쓰러진 나무가 부서지고 있다. “자연 안에 산 것만 있어야 합니까!” 밑에서 죽었다고 베어버린 나무등걸을 보면서 박그림선생이 한 말이 생각난다. 


 

그저 제 목숨 다하면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태어날 다른 목숨 밑거름이 되면 그만인 것을. 왜 사람들은 자연을 간섭하고 다스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무줄기가 하얀 사스래나무(거제수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꽤 높이 올라온 모양이다. 사스래나무나 거제수나무는 나무껍질이 하얀색이고 종이같이 얇게 벗겨진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동물학자 박인주선생은 이 나무껍질에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컴퓨터로 편지 보내는 지금을 생각하면 여유 있고 낭만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전에 경주에 갔을 때 이 나무껍질에 글과 그림을 그린 유물을 전시한 것을 본 것도 같다.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능선 밑으로 멧돼지가 진흙목욕을 한 흔적을 만났다. 멧돼지는 질퍽질퍽한 진흙에 목욕을 한다. 도시 아낙네 같이 피부가 고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나 해충을 털어내려고 한다고 한다. 혹 피부가 고와지는 것과 관계가 있으려나? “저기를 봐요.” 박그림선생이 옆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킨다. 


 

멧돼지가 진흙에 뒹굴고 소나무에 비빈 흔적이 있다. 소나무 밑동이 달아서 맨들맨들하고 진흙이 묻어있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소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주던 생각이 난다. 깊게 파고든 진드기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 멧돼지 거친 몸짓이 느껴진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갔다. 커다란 전나무 밑으로 산양똥밭이다. 뒤로는 가파른 언덕이 있고 앞은 툭 트였다. 주변으로는 조릿대가 많다. 


 

조릿대 이파리를 뜯어먹고 남긴 산양 이빨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식물을 먹고사는 산양은 겨울에는 먹을거리가 드물다. 그래서 조릿대 이파리나 침엽수 이파리를 뜯어먹으면서 겨울을 난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 똥 색깔은 여름 똥에 비해서 갈색 빛을 띤다고 한다. 낙엽을 들쳐보니 온통 산양 똥이 쌓여있다. 여기저기 똥을 들여다보다가 쪼그리고 앉아 앞을 내다본다.


 

 앞에 펼쳐진 풍광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전혀 사람손이 닿지 않은 자연그대로 나무모양에 푸르스름한 먼 산색과 검푸른 전나무 색, 하얀 사스래나무(거제수나무?) 줄기색깔이 어울려 가슴을 흔든다. 가끔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가슴 벅찬 자연모습을 보면 주눅이 들고 무지렁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돌아서 내려가야 하는데, 내려가는 길이 너무 가팔라요. 

 

조금 더 올라가서 내려갑시다.” 박그림선생이 다시 앞장서 올라간다. 얼마 걷지 않아서 오래된 산양 영역표시와 능선에 있는 산양자리 한 군데를 더 보고 내려가는 길을 잡았다. 발길을 틀려고 하는데 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가 보인다. 그냥 지나기가 아쉬워 먼저 내려가시라 하고 겨우살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뒤따라 내려가니 벌써 산양자리를 빌어 점심상을 벌렸다. 늦은 2시쯤, 늙어 쓰러진 나무 옆에 있는 산양자리에서 주먹밥을 먹었다. 


 

아늑한 자리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고 바람 한점 없다. 햇살이 따듯하다. 대승골 산양자리는 가는골이나 피골하고는 다르다. 가는골이나 피골 산양자리는 큰 바위를 등지고 앞이 절벽이면서 툭 트인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승골은 능선을 타고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세 군데가 가지고 있는 같은 점이 있다. 시야가 탁 트여서 맹수를 경계하기에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점심을 먹고 내려가기에 앞서 앉았던 자리를 살폈다. 많은 똥 무더기와 더불어 오래되지 않은 영역표시가 있다. 

 

나무 굵기는 10mm가 조금 넘을 정도고 키는 허리춤뿐이 오지 않는 아주 작은 나무에 영역표시를 했다. “이야, 요기다 어떻게 뿔로 긁었을까?” 다함께 같은 말을 했다. 전나무 숲을 헤치며 내려오다가 똥 무더기 몇 군데를 더 보았다. 내려오면서 점점 바위가 많아졌다. 커다란 전나무와 바위를 등진 산양자리도 만났다. 어른 두 아름은 넘을만한 전나무도 안아 보면서 바삐 내려왔다. 

 

날이 저물어 가기도 했거니와 오늘 밤에 정선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바삐 내려오다 집채보다 큰 바위를 만났다. 한숨 돌리면서 주위를 살피는데 박그림선생이 바위를 돌아 내려오라고 손짓한다. 바위를 돌아가 보니 바위가 지붕모양을 하고 있다. 바위지붕 밑으로 산양 똥이 널려있다. 아주 오래되어서 허옇게 바뀐 똥부터 눈지 얼마 되지 않은 갈색을 띠는 겨울 똥까지 있다. 


 

산양이 있던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밖을 내다보기도 하면서 오래 머물렀다. 박그림선생은 이 자리에 무인카메라를 설치 할 거라고 한다. 해가 떨어지고 있다. 숲이 침침해 진다. “이제 한 곳만 더 보고 쭉 내려갑시다.” 말과 함께 박그림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시 앞장선다. 두리번거리면서 내려오다 언덕 같은 바위를 만났다. 널따란 바위 위가 산양 똥으로 뒤덮였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부지런히 내려오다 한자리에 영역표시가 세 개 있는 곳을 만났다. 얼마 되지 않아서 껍질이 벗겨진 나무속살이 아직 하얗다. 10월쯤 짝짓기 철에 영역표시를 한 걸 거라고 박그림선생이 미루어 짐작한다. 조릿대 군락을 빠져나오면서 약초꾼들이 남긴 잠자리 흔적을 보았다. 옆에 지성 드리는 제단이 함께 있다. 박그림선생은 등산로로 접어들면서 줄곧 사람들이 산에 오르면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표시리본을 떼어냈다. 자연에 사람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여름에 왕관모양으로 활짝 벌려있던 관중이 겨울을 맞아 방석모양으로 납작 내려앉았다. 산이 새까매지고 하늘에 달이 또렷이 보이는 저녁 여섯시가 다 되어서 백담사로 다시 돌아왔다. 산을 내려와서도 끊임없이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다. 산을 올라가면서 까막딱따구리를 만났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사진을 찍지 못했다. 행동이 느린 탓이기도 하고 날아가 버릴까봐 너무 조심조심한 탓도 있다. 

 

그리고 사서 처음 써보는 80~400mm 망원 줌렌즈를 다루는 것이 서툴러서 이기도 하다. 까막딱따구리는 몸집이 커서인지 나무 쪼는 소리가 오색딱따구리와는 달랐다. 오색딱따구리는 마치 작은북을 빠르게 치듯이 또르르르르르르.... 또르르르르소리가 난다. 그런데 까막딱따구리는 목수가 까뀌로 나무를 쪼는 듯 통 통 통 통 통 통...소리를 낸다. 백담사입구에서 급하게 황태구이백반을 먹고 저녁 7시가 넘어서 정선으로 내달렸다. 


 

1998년 늦가을, 조양강(동강) 줄기에 있는 가수리로 돌너와집을 취재 하려고 갔던 적이 있다. 상평에서 신동으로 이어지는 조양강 줄기가 맑은 물과 물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뼝대(돌 절벽을 그 지역에서는 뼝대라고 부른다.)가 너무 좋아서 그 뒤로도 두 번을 더 갔다. 도시생활을 모두 접고 들어가 살 생각을 했을 정도니 오죽했을까. 19일 아침, 어제 산행 피로가 아직 덜 풀린 꾸덕꾸덕한 몸으로 아침밥을 먹자마자 정선에서 가리왕산입구를 지나 바로 상평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앞을 막았다. 동강댐 공사가 취소된 뒤로 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 됐기 때문에 1,500씩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뭘 하려고 들어 가냐고 다시 묻기에 가수리 취재를 간다고 했더니 그냥 들여보내준다. 들어서면서 이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좁고 울퉁불퉁했던 흙길이 2차로로 넓이고 시멘트 포장이 돼 있다. 멀리 이어지는 시멘트 제방도 보인다. 


 

안쪽도 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수리까지는 가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가다가 비오리 몇 마리를 만났다. 이전 기분을 잠시 잊고 비오리에게 눈이 쏠렸다. 날렵한 부리에 깃털이 바람에 날리듯이 댕기 깃을 가진 암놈, 반짝반짝 검은 빛을 띤 초록머리를 가진 수놈이 물살을 가르며 다니는 모습이 평화롭다.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옆에서 좀 작은 녀석들이 움직인다. 논병아리다. 


 

이리저리 맴돌다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친다. 비오리, 논병아리 둘 다 잠수성 조류다. 물속으로 들어가 물고기 따위를 잡아먹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둥오리나 고니는 수면성 조류다. 이 녀석들은 머리만 물속에 넣고 꽁지는 물 밖으로 내밀고 먹이를 잡는다. 눈을 돌리니 다시 넓어진 시멘트길이 보인다. 일단 가보자. 들어가면서 예상했던 대로 일들이 벌어졌다. 예전에 있던 낮은 흙집들은 헐리고 팬션이며 큼직큼직한 양옥들이 들어섰다. 길을 넓히면서 시멘트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았다. 


 

강을 건너던 배는 다 없어졌다. 가수리는 더했다. 가수분교장 앞에 강을 메워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았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다. 윙윙거리며 도로공사 차가 차선을 긋고 있다. 시멘트 포장 위에 팔뚝만한 가로수를 심었다. 다 깎아내고, 망쳐놓고, 가로수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개발이다. 무지막지해 보인다. 


 

개발을 꼭 해야 한다면 전체 풍광을 고려해서 덜 해치고 어우러지는 모양으로 해야 한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비오리와 논병아리에 마음이 끌려 그냥 돌아 나왔다. 땅, 땅위에 세워 놓은 옥수수 대, 물, 뼝대는 그대로 있는데 사람들이 헐고, 망가뜨린다. 나오면서 비오리, 논병아리를 다시보고 청둥오리 한 쌍도 보았다. 그런데 평화로워 보이지 않고 쓸쓸해 보인다. 


 

사람들 개발에 밀려나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상평입구에 다 나와서 허물어져가는 흙집을 보았다. 흙이 떨어져 집을 진 재료들이 드러나 있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담을 옥수수 대로 엮고 겉을 흙으로 발랐다. 이처럼 우리조상은 사는 지역에서 가장 많고 구하기 쉬운 자연재료로 집을 지었다. 나무가 많은 지방에서는 귀틀집을 짓고 너와나 굴피로 지붕을 얹었다. 돌이 많은 지방에서는 돌로 집을 짓고, 갈대가 많은 지방에서는 갈대로 지붕을 얹었다. 


 

그래서 지방마다 집모양이나 재료가 달라서 지방 특색을 가졌다. 그리고 집을 자연재료로 지었기 때문에 제 목숨 다하면 쓰레기를 남기지 않고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요즘은 어느 지방이나 똑 같다. 아파트를 짓고 도시와 같은 양옥을 짓는다. 그리고 집을 허물면 건물 쓰레기가 엄청나게 나온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삶이 우리 미래를 보장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찹찹한 마음, 가슴 설레게 한 새들을 가슴에 안고 길을 달리고 달려 밤 10시에 집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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