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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일지

사람 기억, 카메라 기억


 

※ 이 글은 지난 2006년에 우리교육 출판사에 연재했던 생태세밀화 작업일지 내용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2006년 2월 6일, 새벽부터 내린 눈이 아침이 밝아오고, 이른 10시가 넘을 때까지 내렸다. 가지각색이던 도시는 하얀색으로 뒤덮였다. 길거리를 다니는 차들은 벌벌 기는가 싶더니, 금세 찻길은 눈이 녹아 비온 뒤와 같은 차바퀴 소리를 내며 달렸다. 어디 나지막한 산에라도 가볼까! 한참을 망설이다 게으름을 피우며 그냥 주저앉았다. 점심을 차려먹고 나서야 가까이 있는 호수공원에라도 나가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는 나이 먹은 회화나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호수공원으로 갔다. 늘 그랬듯이 공원길은 아스팔트로 덮여있고, 잘 다듬어진 나무들만 있다. 넓은 호수에는 새 한 마리보이지 않는다. 날이 개이긴 했지만 해가 구름에 가렸다 나왔다 한다.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이라면 그런대로 괜찮은 사진을 담아낼 수 있는 분위기다. 쭉쭉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흐릿한 해가 보이고, 하얗게 얼어붙은 사이에 제트자로 녹은 호수 물에 비추는 나무 그림자....... 흉내 내어 몇 장 찍으며 걸었다. 눈이 서서히 녹는다.

 

눈 위로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까치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있다. 눈이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나무 위에 까치가 점잖게 앉아있다.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고 갖가지 모습으로 셔터를 누르게 한다. 뚝 잘린 나뭇가지 위에 딱새 수컷 한 마리가 꼬리를 까딱이며 앉아있다. 검은 얼굴에 회색 머리, 검은색에 흰점이 있는 날개, 발그레한 가슴색이 자꾸 눈길을 끈다. 눈이 녹으며 드러내는 나뭇가지와 땅은 새들을 바쁘게 한다. 먹이를 찾아 불이 나게 움직인다. 참새는 무리지어 나무 덤불에 숨었다가 먹이를 찾아 드러난 땅으로 내려앉는다. 어떤 참새는 사람 발자국을 쫓아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박새, 쇠박새도 두세 마리, 네댓 마리 무리지어 나무와 땅을 오가며 빠르게 움직인다.

 

호랑지빠귀로 보이는 녀석은 둘레 나무를 크게 돌며 먹이를 찾는다.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회화나무 앞에 다다랐다. 이미 잔가지에 눈은 녹고, 굵은 가지에만 눈이 남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를 귀하고 신성이 여겨, 회화나무를 심으면 집안에서 학자가 나오고, 관직에서 이름을 얻고 물러날 때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집 앞문에 세 그루를 심으면 잡귀가 가까이 오지 못하고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은 회화나무.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크게 자란다는 회화나무. 호수공원에 있는 회화나무는 일산 새 도시가 생기고, 호수공원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200년쯤 되었다 하니,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회화나무 그늘 밑에서 쉬어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함안 칠북면에 있는 회화나무는 500년쯤 살고 있다고 한다. 비록 몸이 늙어 수술을 받고 서 있지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회화나무를 보면서 행복해 하고, 그늘 밑에서 쉬어갈지는 또 아무도 모를 일이다. 눈 내린 지금도 이 회화나무 앞에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며 뛰어놀고 있다. 나무가 나이가 들면서 제 모양을 바꿔 가듯이 아이들이 만드는 눈사람 모양도 바뀌는가보다.

 

대여섯 살 먹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만든 눈사람은 토끼모양을 하고 있다. 눈사람이 녹고, 봄바람이 불면 회화나무는 어김없이 새싹을 내밀고, 꽃 피고,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회화나무 생각들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길에 박새며 참새 떼를 다시 만났다. 흐릿한 내 그림자가 또렷해져 뒤돌아보니 구름에 가렸던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환하게 비췄다.

 

뿌듯한 가슴으로 셔터를 눌렀다. 다시 한번 눌렀다. 셔터가 눌리지 않는다. 메모리카드가 고장 났다. 지금껏 찍은 사진이 날아갔다. 한참을 당황하고, 억울한 생각에 일손을 잡을 수 없었다. 억울한 생각이 가시면서 차근차근 되새김질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진에 목매달았던가? 세밀한 그림을 그리려니 정확한 자료가 필요해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거꾸로 들여다보면 사진으로 담는다는 핑계로 순간순간을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가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좀더 깊은 관찰을 해야 한다. 사람 실수든 기계 실수든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기계보다는, 좀 느리고 어눌해도 사람 머리에, 사람 가슴에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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