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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세밀화를 그리면서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열매

                                                짝을 만난 귀뚜라미. 꽁무니에 산란관이 있는 오른쪽이 암컷

살면서 자연이 바뀌어가는 걸 보면 가끔 절기가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 문턱을 알리는 절기다. 올해 8월 8일이 입추였는데, 입추를 바로 지난 8월 10일에 처음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었다. 가을밤 맑게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소리는 짝짓기 할 암컷을 부르는 수컷 귀뚜라미 울음소리다. 죽음을 앞둔 수컷 귀뚜라미가 암컷을 애타게 부르는 울음소리다. 수컷은 짝짓기가 끝나면 곧 죽고 말기 때문이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이고, 산과 들에서도 갖가지 열매가 자라고 익어간다.


입동을 한 달쯤 앞둔 10월에 접어들면 갖가지 모양과 빛깔을 띤 열매가 눈에 보인다. 우리 둘레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열매 가운데 빨갛고 길쭉한 산수유 열매가 있다. 빨간 산수유 열매를 보면 금방 입에 침이 고이고 만다.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산수유차 맛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산수유나무는 집 둘레에 많이 심어서 흔하게 볼 수 있다.

                                                                              파라칸다 열매를 먹는 동박새

또 흔히 볼 수 있는 열매 가운데 파라칸다 열매와 좀작살나무 열매가 있다. 파라칸다는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지만 가을에 붉은빛 열매가 보기 좋아서 울타리에 많이 심는다. 빈틈없이 다닥다닥 달려있는 파라칸다 열매를 보면, 가을 풍성함이 절로 느껴진다. 달곰한 맛이 있어서 새도 좋아하는 열매다.


파라칸다 열매보다 작지만 보랏빛 열매를 다닥다닥 달고 있는 나무도 있다. 바로 좀작살나무다. 작살나무는 가지가 어느 것이나 원줄기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두 개씩 마주 보고 갈라져 있어 작살 모양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름이 작살나무이고 좀작살나무는 작살나무보다 작다는 말이다. 본래 산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요즘은 꽃과 열매가 보기 좋아서 집 둘레에 많이 심는다. 가을볕에 반질반질 빗나는 보랏빛 열매를 보면 보석 가운데서도 보석을 보는 기분이다.

                                                                            붉게 익어가는 찔레나무 열매

집 둘레를 조금 벗어나 나지막한 산기슭을 걷다보면 10월에 피는 용담이나 감국을 만날 수도 있고, 붉게 익어가는 찔레나무 열매나 노랗게 익은 노박덩굴 열매를 만나기도 한다. 찔레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하얀 찔레꽃에 얽힌 시나 노래도 많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봄에 굵은 찔레나무 새순을 뚝 꺾어서 껍질을 술술 벗겨 먹었다. 요즘 갖가지 양념을 한 음식보다야 못하겠지만 먹을거리가 없는 봄철에 배고픔도 달래고 나름 달곰한 맛에 자꾸만 손이 가고는 했다. 찔레 순이 아이 성장발육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못 먹던 시절에 거저 보약을 먹고 자란 셈이다. 하얀 찔레꽃 향내는 장미꽃 못지않고 요즘 보는 온갖 장미꽃도 찔레나무를 품종개량해서 나온 것이니 흔하지만 더욱 소중해 보인다.


노박덩굴은 이름에 있듯이 덩굴나무다. 우리나라 어느 산기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작업실 뒤꼍에도 대추나무를 높게 타고 올라가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트리며 자라는 노박덩굴이 있다. 이처럼 반 그늘진 나무 아래서 잘 자란다. 열매는 둥글고 10월에 노랗게 익는데, 노란 껍데기가 세 개로 갈라져 짙은 주황빛을 띤 씨앗이 보인다. 대추나무 허리쯤에서 터트린 열매를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에 빨갛게 떠있는 별 같아 보인다.


산기슭에서 몇 걸음만 산으로 들어서면 밤나무나 도토리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도토리나무는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 신갈나무와 같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었다. 또 도토리는 다람쥐나 멧돼지가 좋아하는 먹이이기도 하다. 요즘은 산에서 도토리를 줍지 말자는 운동도 벌리고 있다. 사람이 먹으려는 욕심 때문에 숲에서 사는 야생동물이 굶주리기 때문이다. 밤나무는 산에도 있지만 밤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래서 도시에서도 겨울이면 쉽게 군밤을 먹을 수 있다.


작업실 뒤꼍에도 커다란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10월에 들어서면 퉁 퉁 툭 투둑 알밤이 떨어지면서 지붕을 때리고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한꺼번에 많은 알밤이 떨어지면서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아서다. 밤나무는 별다른 손길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잘 자란다. 그래서 떨어진 알밤을 주울 때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 일 한 것 없이 포근한 찐 밤을, 구수한 군밤을 먹을 수 있으니까. 10년 전쯤 충북 괴산에 살 때도 뒤꼍에 커다란 밤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몇 알 주워 먹지 못했다. 열흘을 두고 청설모가 다 가져갔기 때문이다. 청설모가 어쩌다 실수로 떨어트린 몇 알을 주워 먹었을 뿐이다. 열흘 내내 밤송이 채 따가는 청설모를 쪼그리고 앉아서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밤농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밤만 먹고 살 것도 아닌데 청설모 너라도 잘 먹으면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