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중순에 점봉산에 든 적이 있다.
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군 진동계곡으로 갔다.
이곳은 1998년 2월 초에 다녀간 적이 있었다.
겨울에 야생동물 흔적을 쫒아서 진동계곡에서 곰배령을 지나
단목령을 넘어 미천골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같이 간 사람들과 하룻밤 민박을 하고 다음날 새벽 6시에
산에 들면서 맨밥과 된장 한 숟가락씩 담긴 도시락을 하나씩 챙겼다.
산에 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 동의나물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조금 더 올라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참나물과 곰취를 뜯었다.
그러고는 계곡물에 훌훌 씻어 배낭에 넣었다.
조금씩 오를수록 뿌리에서 오줌 지린내가 난다는 쥐오줌풀도 있고,
1미터나 되어 보이는 이파리로 커다란 왕관 모양을 한 관중도 있었다.
벌깨덩굴, 피나물도 꽃이 피어 있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다가 처음으로 속새라는 풀을 만났다.
속새는 이파리가 퇴화 되어 없고 줄기에 마디가 있어서
가지와 이파리를 떼어낸 작은 대나무 같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더 눈길을 끈 것은, 위로 쑥쑥 솟은 속새와 함께
이파리가 어른 손바닥만 한 연령초가 무리지어 하얀 꽃이 핀 거였다.
둘레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바람꽃도 하얗게 피었고
피나물도 숲을 노랗게 물들이며 피어 있었다.
‘참, 때를 잘 맞춰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 ‘아차’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얼레지였다. 얼레지는 이미 꽃이 시들어 열매를 맺고 있었다.
꽃이 졌는데도 왜 자꾸 분홍빛 얼레지 꽃이 보고 싶어지던지!
어느 시인은 얼레지 꽃이 옛 간호사 모자를 닮아서 간호사꽃 이라고 했다는데……
다행이도 산 높이에 따라서 같은 꽃이라도 꽃 피는 때가 달랐다.
산 위로 올라갈수록 추워지니까 꽃은 늦게 피었다.
해발 1000미터 남짓 되는 곰배령에 다다랐을 때는
간호사 모자를 닮은 짙은 분홍 얼레지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맑은 분홍빛 꽃잎을 날렵하게 뒤로 젖히고
커다란 풀빛 이파리에는 짙은 자줏빛 무늬가 있는 얼레지.
분홍빛 풀빛 자줏빛이 만든 빛깔 어울림이 마음을 사로잡고 설레게 했다.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걸어 올라간 곰배령 고갯마루는 아주 널따란 풀밭이다.
곰배령 고갯마루 풀밭은 철따라 꽃이 바꾸어 피며
아름다운 화원을 이루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갖가지 봄꽃이 어우러져 핀 풀밭에서 달콤한 아침을 먹었다.
둥글 넙적한 곰취에 된장을 바르고, 맨밥을 한 숟가락 얹고
참나물을 올려서 싸 먹었다.
온 세상을 털어 이런 밥맛이 또 있을까?
따스한 봄 햇살에 온갖 꽃빛깔이 아른거렸다.
풀밭 넘어 옥빛 하늘. 숲에서 뜯은 향내 짙은 곰취와 참나물 그리고 산골 된장!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밥상이었다.
한숨 돌리고 점봉산 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푸짐히 먹은 탓에 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거기다 얼레지를 보았으니 걸음이 늦어질 수밖에.
배낭 어깨끈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늙어 말라 죽은 커다란 나무도 지나고,
서서히 눈앞이 트이더니 맑고 진한 분홍 진달래 밭이 펼쳐졌다.
‘밑에는 진달래가 다 졌는데. 혹시?’ 그랬다.
해발 1400미터 남짓 되는 점봉산 꼭대기는 이제 봄이 오고 있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박새 새순이 푸릇푸릇 올라오고,
갓 고개 숙여 핀 얼레지 꽃과
아직 터트리지 않은 얼레지 꽃봉오리가 여기저기 있었다.
‘이야,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 보는 점봉산 꼭대기는 이제야 봄이구나!’
속으로 되뇌며 내려오는 길에 큰앵초도 보고 홀아비바람꽃도 보고
멧돼지가 풀뿌리를 파먹으려고 땅을 갈아엎은 자리도 보았다.
다시 돌아온 민박집 마당에는 어미 개와 새끼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당 둘레로 연령초와 개불알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어! 어떻게 산에서 못 본 개불알꽃이 여기에……?’
산에서 캐다 심은 거다.
산에 들면서 곰취와 참나물을 뜯을 때 민박집 아저씨가 말했었다.
“예전에는 참나물이 무척 흔했어요.
그런데 농협에서 참나물을 재배해 농민 소득을 올린다고 뿌리 채 캐 갔어요.
씨를 받아가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드물어요.”
그렇다면 산골 몇 집이 캐다 심는 건 괜찮을까?
아름다운 꽃을 꼭 혼자 보아야 더 아름다울까?
정작, 지금 산에는 개불알꽃이 드물어졌는데…….
집으로 돌아와 점봉산 꼭대기에서 만난 얼레지를 그렸다.
그 뒤 석 달이 지난 8월 중순, 곰배령에 다시 갔다.
‘몇 달 사이 더 많이 알려졌나?’
꽃을 보려고 곰배령을 찾는 사람은 끊이지를 않았다.
막 곰배령 고갯마루를 올라서려는데
안내자를 앞세운 어른 아이 수십 명이 줄지어 내려왔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많은 사람이 줄지어 다니고, 꽃을 가까이서 보려고
없던 길이 사방으로 만들어졌다. 온갖 꽃을 짓밟아 놓고 말았다.
이번에 머문 민박집은 월남전에서 고엽제 피해를 입은 아저씨가 주인이었다.
도시에서 살면 자꾸 몸이 나빠지는데 시골에서 살면 몸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진동리에 살면서 방송사에서 취재할 때
여러 번 안내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안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까닭은 ‘안내를 하고 방송이 나간 뒤, 조금 이따 가보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놓더라고!’ 라고 했다.
아저씨 말을 들으며 한 신문이 떠올랐다.
여름으로 들어설 무렵에 곰배령을 신문에 크게 소개를 했다.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 풀꽃이 사는 곳이니 잘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마구 짓밟고 만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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