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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세밀화를 그리면서

지렁이 똥


                                                                           책 《지렁이가 흙 똥을 누었어》 가운데


다섯 해 전 봄에 작업실을 도시에서 시골로 옮겼다.

마당에 조그만 텃밭이 있는 시골집이다.

봄이니 곧바로 먹을 채소를 심었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텃밭에 쪼그려 앉아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은 까맣게 잊은 채로.

텃밭에 채소를 심으려고 흙을 뒤집어도 지렁이가 꿈틀,

김을 매면서 호미질을 해도 지렁이가 꿈틀.

뒷마당 밤나무 밑에 쌓인 가랑잎을 뒤지면

지렁이 서너 마리가 꿈틀꿈틀, 마당 여기저기에 지렁이가 살았다.

 동물은 먹은 대로 똥을 눈다.

 지렁이는 흙을 먹고 흙 똥을 눈다.

 흙 똥이 탑 같이 높게 쌓이기도 하고

 성처럼 길게 이어져 쌓이기도 했다.




메마른 듯 동글동글 쌓인 똥, 부드럽게 몽글몽글 쌓인 똥,

푹푹 납작하게 퍼진 똥, 조금 노란빛을 띠는 똥,

고동빛을 띠는 똥, 거무죽죽한 빛을 띠는 똥.

때마다 다른 모양 다른 빛을 띠는 똥이 마당 곳곳에 있었다.


차츰차츰 지렁이 똥을 보며 상상하기 시작했다.

메마른 똥을 보면 거친 흙을 먹었나?

똥을 누는데 힘들지는 않았을까?

노란빛, 거무죽죽한 똥을 보면 땅 밑에는 다른 빛깔을 띤 흙이 있겠지?

혹시 노란빛 나뭇잎을 먹었나?

다른 동물하고 견주어 보기도 했다.

산양이나 고라니는 풀을 먹고 콩장 같은 똥을 눈다.

그런데 여름철에 물기가 많은 풀을 먹고는 푹 퍼진 똥을 누기도 한다.

푹푹 납작하게 퍼진 지렁이 똥을 보면

요 녀석은 물기가 많은 흙을 먹고 누었나? 하고 상상했다.

실제로 비가 온 다음 날에 눈 지렁이 똥은 퍼진 똥이 많기도 하다.



마당에 핀 탐스러운 우리 민들레,

곱디고운 제비꽃, 꽃마리, 별꽃을 비롯한 수많은 들꽃이 피어오르고,

고추, 토마토, 가지, 오이 같은 채소가 잘 자라는 것도,

게으른 주인 대신 지렁이가 잘 자라게 해주는 거였다.

                                                                        초여름 애기메꽃 아래 지렁이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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